1장. 비 내리는 수요일
비가 오면 민우는 늘 같은 냄새를 맡았다.
젖은 아스팔트, 오래된 종이, 싸구려 커피, 그리고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본 적 없는 이름 하나.
다서.
그 이름은 그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젖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필름에 묻은 물방울처럼, 손끝으로 닦으려 할수록 더 번져갔다.
2026년 여름, 민우는 아직 취업 준비생이었다. 서른이 넘도록 합격 통보보다 불합격 메일을 더 많이 받았고, 방 한쪽에는 입지도 않는 정장과 오래된 문제집들이 먼지를 먹고 있었다. 그날도 면접에서 떨어진 뒤였다. 그는 비를 피해 신촌 뒷골목의 오래된 헌책방으로 들어갔다.
책방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고, 천장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민우는 별생각 없이 책장 사이를 걷다가 구석에 쌓인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 위에는 빛바랜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개당 천 원.
그는 이유 없이 그 안을 뒤졌다. 낡은 문고본, 누군가의 영어 단어장, 오래된 사진첩 사이에서 검은색 수첩 하나가 손에 걸렸다.
수첩 첫 장에는 날짜 하나가 적혀 있었다.
2004년 8월 17일.
그리고 그 아래, 짧은 문장.
다서가 사라졌다.
민우는 숨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분명 처음 보는 수첩이었다. 그런데 종이의 감촉, 잉크의 번짐, 오른쪽 아래를 접어두는 습관까지 어딘가 익숙했다.
다음 장에는 더 이상한 문장이 있었다.
경찰은 사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을 무서워했다.
민우는 수첩을 덮지 못했다.
마지막 장에는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강가. 여름. 민박집. 불꽃놀이. 웃고 있는 네 사람.
긴 머리의 여자. 다서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그 옆에서, 스무 살의 민우가 웃고 있었다.
그는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그는 그 여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하고 있었다. 비, 젖은 길, 회색 하늘, 북한강이라는 이름.
하지만 다서만 없었다.
그날 밤, 민우는 잠들지 못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없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바로 문자가 왔다.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지 못해?
잠시 뒤,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다서는 살아 있어.
2장. 잃어버린 여름
민우는 다음 날부터 자신의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싸이월드 백업 파일, 대학 동아리 카페, 폐쇄된 게시판의 흔적, 외장하드 속 흐릿한 사진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2004년 8월의 기록만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그해 여름, 그는 대학 사진동아리 사람들과 북한강 근처로 MT를 갔다. 함께 간 사람은 민우, 준모, 혜린, 그리고 다서.
민우는 준모를 찾아갔다.
스무 살 이후 거의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였다. 준모는 이제 작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깔끔한 셔츠, 값비싼 시계, 미소 없는 얼굴. 민우가 수첩과 사진을 꺼내자 준모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이걸 어디서 났어?”
“헌책방에서.”
“버려.”
준모는 즉시 말했다.
“이건 네가 다시 볼 물건이 아니야.”
민우는 준모를 가만히 보았다.
“다서 기억나?”
그 이름이 나오자 준모의 손이 멈췄다. 커피잔 위로 손가락이 떨렸다.
“기억나지.”
“그런데 왜 아무도 말 안 했어?”
준모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여름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너 정말 기억 안 나?”
“뭘.”
“다서가 아니라 네가 문제였어.”
민우는 웃을 뻔했다. 너무 어이없는 말이었다.
“내가?”
준모는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너는 네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어.”
“그게 무슨 뜻이야?”
“다서는 사라진 게 아니었어.”
민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준모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사라지게 만든 거야.”
그 순간 민우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 표시 없음.
이번에는 준모가 먼저 화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받지 마.”
하지만 민우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는 빗소리 같은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준모는 아직도 거짓말을 잘하네.”
민우는 얼어붙었다.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가슴 한가운데가 아팠다.
3장. 다서
민우는 수첩을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록처럼 보였던 문장들이, 읽을수록 고백처럼 느껴졌다.
다서는 늘 사람들을 관찰했다.
다서는 사진보다 기록을 믿었다.
다서는 웃을 때 먼저 눈을 피했다.
다서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다서는 물을 무서워했다.
수첩의 글씨는 분명 민우의 것이었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수첩은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몇몇 문장은 나중에 덧쓴 것처럼 잉크 색이 달랐다.
다서는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 중 가장 먼저 진실을 알았다.
그래서 사라졌다.
민우는 혜린을 찾아갔다.
혜린은 지방의 한 병원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민우를 보자마자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결국 찾았구나.”
“뭘?”
“수첩.”
민우는 테이블 위에 수첩을 올려놓았다.
혜린은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다서는 어떤 사람이었어?”
민우가 묻자, 혜린은 웃었다. 슬프게.
“너를 좋아했어.”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너도 다서를 좋아했어.”
비가 유리창 밖으로 흘러내렸다. 민우는 자신의 안쪽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
혜린은 손을 모았다.
“그날 밤 네가 다 봤으니까.”
“무슨 말이야?”
“준모가 한 짓.”
혜린은 말끝을 삼켰다.
스무 살 여름, 북한강 근처 민박집. 술에 취한 밤. 불꽃놀이. 어두운 강변. 준모는 다서에게 집착했다. 다서는 그걸 거절했다. 그리고 준모는 다서가 찍어둔 사진 한 장을 빼앗으려 했다.
“무슨 사진?”
“그 애가 우연히 찍은 거.”
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가에서 벌어진 사고. 아니, 사고처럼 꾸며진 일.”
민우는 머리가 아파왔다.
“누가 죽었어?”
혜린은 그를 보았다.
“네가 아직 거기까지 기억 못 하는구나.”
그날 밤, 민우는 꿈을 꾸었다.
강가였다.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누군가 울고 있었다. 다서가 민우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기억해. 네가 잊으면 나는 진짜 없어져.”
그리고 꿈속의 민우는 대답했다.
“내가 널 지켜줄게.”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4장. 그날 밤
민우는 북한강으로 갔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낡은 주소가 적혀 있었다. 강변 근처의 폐업한 민박집.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건물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22년 전처럼.
민박집은 무너질 듯 낡아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민우는 손전등을 켜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벽에는 오래된 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 물자국의 모양을 기억했다.
그때였다.
2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숨을 죽였다.
“민우야.”
여자의 목소리.
그는 계단 아래에서 굳었다.
“다서?”
대답은 없었다.
민우는 천천히 올라갔다. 2층 방 끝, 창문이 강 쪽으로 난 작은 방. 그곳에는 오래된 사진 인화지가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을 때, 기억이 밀려왔다.
2004년 8월 17일 밤.
준모는 다서의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다. 다서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졌고, 필름통이 굴러갔다.
다서가 말했다.
“민우야, 봤지?”
민우는 봤다.
강가에서 준모가 누군가를 밀치는 장면. 물소리. 비명. 검은 강.
죽은 사람은 동아리 선배 강우였다. 모두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했다. 발을 헛디뎌 빠진 사고라고 했다.
하지만 다서는 사진을 찍었다.
준모는 다서에게 달려들었다. 민우는 막으려 했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누군가 넘어졌다.
그리고 다서가 사라졌다.
강으로 떨어졌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하지만 민우는 이제 기억했다.
다서는 강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민우를 보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입술로, 아주 조용히.
“내가 없어져야 네가 살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준모였다.
그는 오래된 우비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손전등과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지 말았어야지.”
민우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다서 살아 있어?”
준모는 한숨을 쉬었다.
“그걸 아직도 믿고 싶어?”
“네가 보낸 문자야?”
준모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 순간, 창밖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누군가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준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돼.”
그는 창가로 달려갔다.
그 아래, 비 속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머리. 검은 우산. 너무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민우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서야?”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5장. 살아 있는 사람
준모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민우도 뒤따랐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젖은 흙 위에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필름과 쪽지가 들어 있었다.
기억은 죄가 아니다.
찾지 말고, 말해.
민우는 경찰서로 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22년 전 사고, 사라진 여자, 갑자기 나타난 필름.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그러나 필름 속에는 분명한 장면이 있었다.
강우가 강으로 밀려나는 순간.
준모의 얼굴.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스무 살의 민우.
준모는 도주하다 붙잡혔다. 그는 끝까지 말했다.
“다서는 죽었어. 민우가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하지만 경찰 기록은 이상했다.
다서의 실종 신고는 없었다.
가족 등록도 불분명했다.
학교 기록에는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
사진동아리 명단에도 다서라는 이름은 없었다.
민우는 경찰서 복도에서 혜린을 붙잡고 물었다.
“다서가 누구야?”
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가 같이 봤잖아. 같이 있었잖아.”
혜린은 눈을 감았다.
“있었어.”
“그런데 왜 기록이 없어?”
“그 애가 원했으니까.”
“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혜린은 조용히 말했다.
다서는 가정폭력에서 도망친 아이였다. 주민등록도, 학교도, 집도 온전하지 않았다. 강우는 그런 다서를 숨겨주고 있었다. 준모는 그걸 알게 됐고, 강우를 협박했다. 강우가 맞서자, 그날 밤 일이 벌어졌다.
다서는 모든 걸 찍었다.
그리고 민우에게 필름을 맡기려 했다.
하지만 민우는 두려웠다. 준모가 협박했고, 혜린은 울었고, 경찰은 사고라고 했다. 민우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서 다서는 사라졌다.
“그 애는 네가 자기를 지켜주길 바란 게 아니야.”
혜린이 말했다.
“네가 너 자신을 버리지 않길 바랐어.”
민우는 그날 밤 이후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버린 것이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며칠 뒤, 민우는 다시 문자를 받았다.
고마워.
그게 전부였다.
그는 답장을 썼다.
다서야?
전송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6장. 그녀가 사라진 여름
사건은 뒤늦게 기사화되었다.
2004년 북한강 익사 사고 재수사. 유력 용의자 체포. 사라진 목격자. 잃어버린 필름.
사람들은 잠깐 떠들다가 금세 잊었다.
민우는 오래된 수첩을 들고 북한강으로 갔다. 비는 그쳤고, 강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그는 22년 전 민박집이 있던 자리에 섰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도, 마당도, 그들이 웃던 여름도.
다만 오래된 나무 벤치 하나가 남아 있었다.
벤치 위에는 봉투가 놓여 있었다.
민우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누가 두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봉투를 열었다.
사진 한 장.
2004년 여름.
강가에 앉은 다서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웃지 않았다. 대신 렌즈 너머의 누군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기억해 줘.
찾지는 말고.
민우는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그때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긴 머리. 흰 셔츠. 작은 가방.
민우는 숨을 삼켰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흐릿했다. 너무 멀어서, 너무 오래되어서, 민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
버스가 도착했다.
여자는 버스에 올랐다.
민우는 뛰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았다.
버스가 천천히 출발했다. 유리창 너머로 여자의 얼굴이 잠깐 보이는 듯했다.
다서였을까.
아니면, 그가 끝내 놓아주지 못한 스무 살의 여름이었을까.
민우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첫 장을 펼쳤다.
2004년 8월 17일.
다서가 사라졌다.
그는 그 아래에 새 문장을 적었다.
2026년 7월.
다서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뒤,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여름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