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수첩 속의 나

hertzalpha 2026. 6. 7. 13:01

수첩 속의 나

1장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눈이 떴다. 알람이 아니라 비였다. 요즘 나를 깨우는 건 늘 비나 배고픔 같은, 약속도 책임도 없는 것들이었다.

천장 한구석에 번진 누런 물자국을 한참 바라봤다. 지난봄부터 저기 있었는데 집주인에게 말할 기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 시.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고, 더 누워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게 가장 견디기 힘든 종류의 아침이었다. 늦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부지런한 것도 아닌, 그냥 시간이 나를 통과해 흘러가는 아침.

취업 준비를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넣은 자기소개서가 몇 개인지 세는 일도 그만뒀다. 처음에는 떨어질 때마다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떨어진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합격 문자는 오지 않았고, 불합격 문자는 대개 오지도 않았다. 회사들은 떨어뜨린 사람에게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정확한 평가 같았다. 연락할 가치도 없는 사람.

친구들은 하나둘씩 회사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대기업, 누군가는 은행, 누군가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한 녀석은 사원증을 목에 걸고 찍은 사진을 단체 대화방에 올렸다. 다들 축하한다고 했다. 나도 했다.

나는 아직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애매한 신분이었다. 어디에 속하느냐는 질문에 한 단어로 답할 수 없는 사람.

창문을 열었다. 젖은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흙냄새 같기도 하고 콘크리트 냄새 같기도 한, 도시가 비에 젖을 때만 나는 냄새였다.

괜히 신촌에 가고 싶어졌다.

왜 신촌인지 모르겠다. 그냥 신촌이었다. 대학 시절 거기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울한 날이면 늘 신촌이었다. 마치 그곳에 두고 온 무언가가 있는 사람처럼.

2장

버스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우산을 같이 쓰는 연인들. 혼자 이어폰을 꽂고 걷는 학생들. 모두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그 어디가 어디인지 아는 얼굴들이었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못생기지는 않았다. 잘생긴 것도 아니다. 키도 크지 않다. 학교는 괜찮은 곳을 나왔다. 취직도 언젠가는 하겠지. 결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그 중간이었다. 모든 게 '괜찮은 정도'이고 '언젠가는'이었다. 나는 어디서나 평균이었고, 평균이라는 건 결국 누구의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게 보이지 않았다. 미래를 떠올리면 안개 낀 도로 같았다. 분명 길은 이어져 있는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최근 소개받은 미영 생각이 났다. 예쁜 여자였다. 착하고 말도 잘 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고, 관심 있는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전 같이 영화를 봤다. 어두운 상영관에서 두 시간 동안 그녀의 손을 잡을지 말지만 고민하다가 결국 잡지 못했다.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사실 익숙한 감정이었다. 나는 늘 그런 위치였다. 누군가에게 강하게 선택받아 본 적이 없었다. 미지근하게 좋게 여겨졌고, 미지근하게 잊혔다.

버스는 신촌역에 도착했다. 비는 더 굵어져 있었다.

3장

예전에 자주 가던 골목 안 카페를 찾아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다. 유리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예전에는 밤새 사람이 가득했던 곳이었다. 친구들과 허세 섞인 철학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던 여자 이야기를 하고, 세상을 바꿀 것처럼 떠들던 곳. 그때는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이 평범한 어른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불 꺼진 유리창 안으로 의자들이 거꾸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이 조금 슬펐다.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른 채 슬펐다.

근처 다른 카페에 들어갔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비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문득 창밖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우산도 쓰지 않고 건너편 건물 처마 아래 서 있었다. 비에 어깨가 젖고 있었는데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를 비껴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고개를 돌렸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학과 선배인가. 어디 취업스터디에서 본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착각인가. 나는 시선을 돌렸다. 커피를 마시고, 의미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창밖을 보았을 때 남자는 없었다.

4장

한 시간쯤 지났을까.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카페 구석 창가 자리 밑에서 작은 수첩 하나가 보였다. 갈색 가죽 수첩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가죽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꽤 오래된 물건 같았다. 누가 두고 간 모양이었다.

주인을 찾아주려다가 무심코 펼쳐 보았다.

첫 페이지.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짧은 문장이 있었다.

 

     2001년 5월.

    그리고 다음 장.

   오늘도 신촌에 갔다.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계속 읽기 시작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비가 내렸다.
    별 이유 없이 버스를 타고 왔다.
   최근 소개받은 미영 생각이 났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미영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우연이었다. 그저 흔한 이름의 우연.

그런데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영화관에서 손도 못 잡았다.

 

심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나도 며칠 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생각이었다.

우연일 뿐이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우연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굴렸다. 그러나 굴릴수록 그 단어는 점점 더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다음 장을 넘겼다.

 

    메탈 기타를 배우고 싶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연고전 응원을 가보고 싶다.
    이대 축제도 한 번 못 가봤다.

 

전부 내 안에 있던 것들이었다. 누구에게도 꺼낸 적 없는, 이루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쌓아둔 작은 소망들.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이걸 알지. 어떻게 25년 전 사람이.

나는 수첩을 덮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

천천히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2001년. 정확히 25년 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첩 속의 사람은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따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정해진 길을, 누가 이미 한 번 걸어본 길을, 나는 그저 두 번째로 걷고 있을 뿐인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몇 장이 거칠게 찢겨 있었다. 누군가 급히, 혹은 화가 나서 뜯어낸 것처럼.

맨 마지막에 남은 페이지. 거기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오늘 카페 창가에서 나를 보았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밑에 한 줄이 더 이어져 있었다.

 

    그는 내가 젊었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손끝이 떨렸다.

창밖을 바라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다시 서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비 사이로, 흐려진 유리창 너머로, 그는 오직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5장

나는 벌떡 일어나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가 얼굴을 때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셔츠 안까지 스몄다. 도로를 건넜다. 신호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뒤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목도, 버스 정류장도, 편의점 앞도. 아무도 없었다. 빗물만 보도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누구도 서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흘끔거렸다. 그 시선들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적어도 나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6장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왔다. 수첩은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꺼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든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몇 번 신호가 울리고 그녀가 받았다.

 

    "여보세요?"

    "응."

    "뭐 해?"

    "아빠 유품 정리 중."

    "유품?"

    "응."

 

그제야 떠올랐다. 며칠 전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나는 위로의 말을 제대로 건넨 적도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아빠가 젊을 때 소설 쓰셨거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영은 계속 말했다.

 

    "이상한 수첩도 발견했어."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수첩?"

    "신촌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멈출 기색이 없었다.

 

    "거기에 이상한 문장이 있어."

    "무슨 문장?"

 

잠시 정적.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미영이 천천히 읽었다.

 

    "언젠가 이 수첩을 읽는 청년이 있을 것이다."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어둠 속의 얼굴. 그리고 아주 잠깐, 내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방. 형광등 불빛. 빗소리.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미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상하지?"

    "뭐가?"

    "그 문장 아래 이름이 적혀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안이 말랐다.

 

    "그 이름."

 

그녀가 말했다.

 

    "네 이름이야."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어두운 창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이 지금의 나인지, 25년 전의 누구인지, 25년 후의 나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미 한 번 살아본 적 있는 삶을, 두 번째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비 오는 날, 회색 코트를 입고 어느 카페 창가에 서서, 나와 똑같은 얼굴의 청년을 바라보게 되리라는 것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가 사라진 여름  (0) 2026.06.07